달포 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이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는 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때마침 작년에 소식을 접하여 가입해둔 고교동창 모임방에서 입학 50주년 기념 총회를 한다는 공지를 접하고 한참을 망서리다가 참석하겠다고 이름을 올려둔 터여서 이참에 나들이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부산으로 생활터전을 옮긴지도 20년이 넘었고 그 전에도 상당기간을 서울과 거리가 있는 지역에서 살았던지라 동창회에 얼굴을 내밀 형편이 못되었는데, 활동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두루 알고지내는 친구도 많지 않았던 샌님인 내겐 아직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서먹한 동창회 입니다.
일가중 혼자만 멀리 떨어져 사는 바람에 집안의 대소사와 평안을 위한 의무, 지인의 경조사등의 이유로 그 간 매해 몇 번씩은 수도권에 다녀왔지만 이번엔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들이 기회가 생긴 것이라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 날 아침,
아내가 챙겨준 토스트와 사과 그리고 두유를 담은 아침 도시락을 가방에 담아넣고, 걸어서 10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신해운대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갔습니다.
부전역에서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 열차가 하루에 두 번 있습니다.
요금은 경로할인을 받으면 청량리까지 20,700원. 6시간 정도 걸리니 엉덩이는 좀 아프지만 시간에 매어있지 않은 나에겐 좋은 교통수단 입니다.
동해남부선에서 중앙선으로 연결되는 노선은 우리 산하를 남남서 방향 대각선으로 감상하기에도 제격이니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KTX나 SRT는 정신없이 스쳐가는 창밖과 연속해서 드나드는 터널 속으로 내달리지만 무궁화는 각박하지 않게 지나는 풍광을 보여줍니다.
7시 38분, 신해운대를 출발하여 기장-남창-태화강-북울산-경주에 도착하니 8시 56분.
기와가 얹혀진 고풍스런 역사를 기대하였건만 웬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철역 스타일의 플랫폼이 다가옵니다.
이제 철길은 더이상 경주시내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저 외곽을 멀직이 지나쳐 갈 뿐이지요.
경주를 지나면서 철길은 중앙선으로 전환되어 야화-영천-신녕을 지나면 아름다운 역으로 꽤 알려진 화본에 정차합니다.
이어서 탑리-의성-안동을 지나가니 오락가락 하던 하늘이 파란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네요.
11시, 열차는 영주에 도착하고 기관차를 교체합니다. 지금까지는 디젤기관차, 지금부터는 전기기관차.
11시 6분, 영주를 떠나 풍기-단양-제천을 지나며 시멘트의 고장 답게 여러 시멘트 공장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원주-서원주-양동-매곡-일신-지평-용문-양평-청량리에 13시 42분 도착.
광역 구간으로 치자면 부산, 울산, 경북, 충북, 강원, 경기를 거쳐 서울로 진입한 것입니다.
청량리역에 내려선 어느쪽으로 나가야할지 몰라 어리둥절 하였습니다.
배낭과 통기타를 걸쳐메고 강릉행 야간열차를 타러왔던 대학생 시절의 흔적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지요.
내고향 서울은 이제 나를 남이라 합니다.
이따금 올 때마다 느낍니다. 낯익은 곳에 온 익숙함에서 점차 남의 동네에 온 서먹함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서울의 복잡한 지하철 노선은 탈 때 마다 외국인처럼 두리번 거리게 합니다. 특히 갈아타는 경로가 어렵습니다.
영등포의 숙소에 가방을 놓고 저녁6시 시간에 맞추어 종로의 모임장소로 갔습니다.
백여명의 참석자중 나와 서로 아는 얼굴은 서너명.
긴장을 낮추고 기억을 소환해 보니 몇몇의 얼굴을 더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두세명이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니 서로 아는 얼굴이 대여섯으로 늘었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 입니다.
동급생이 15개 반에 900여명 이었으니 학교때부터 원래 몰랐던 사이였다는 것이 맞겠지요.
연혁을 들어보니 1985년에 동창모임을 결성하여 벌써 40년째 유지해오고 있었답니다. 일부는 지속적으로 만남을 유지하였던 것 같았고, 상당수는 퇴직의 나이가 되면서 근래에 합류한 모양 이었습니다.
낯가림의 어색함으로 쭈뼛거리고 있는데 다행히 너도나도 편하게 말을 걸어주니 부담이 덜하여 집니다. 동기동창이라는 모임의 성격이 초면이라도 격의 없이 반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합니다. 그러자 점차 나도 그들의 일부가 되어지는 느낌이 됩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대부분의 동창회가 그렇듯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이 주도하여 구성하고 나와서 목소리를 낼만 하다는 친구들이 우선적으로 모여든 듯이 보입니다. 국회의원, 장성, 사업가, 전문경영인 그리고 다수의 교수님들... 지금은 모두 전직이 되었지만.
평균적인 생활인으로 살아온 내자신이 초라해 지는 느낌이 잠시 들기도 하였지만... '내가 왜?' 누구한테도 피해준 적 없고, 남에게 부끄러운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아이들도 잘 커주어서 제 몫을 하며 살고 있는데....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자격지심을 제거하니 친구가 모두 그냥 친구로만 보입니다.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보통의 사람에겐 선뜻 동창회에 나가지 못하고 망서려지는 것이 인지상정 이지만, 일단 나이를 웬만큼 먹고나면 잘나고 못난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단지 지나간 시절이 그리울 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은 동창들과 한무리가 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여생의 행복에 의미있는 일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교가제창으로 마무리하고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영등포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는 토요코인 싱글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딱 일본스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작지만, 정돈이 잘 되어 있고 화려하진 않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는 전형적인 비즈니스 호텔의 방입니다.
결혼한 큰 아들과, 아직 총각인 작은 아들이 서울에 살고 있는데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아이들 이지만 우선 내가 이게 편합니다. 드나드는 시간이나 취침시간 그리고 아침식사 등등, 서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내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비싸지 않은 돈으로 산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 시간은 10시. 마포에서 선배를 만날 약속은 12시반.
무엇을 할까? 생각중 불현듯 그래 거기를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화문 연가' 노래를 들을 때면 가사속 그 시절의 장소들이 가슴저미듯 다가왔었는데...
그래서 그 곳을 가보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5호선 전철을 타고 서대문역에서 내렸습니다.
이화여고, 정동교회, 덕수궁을 돌아서 시청앞, 광화문, 경희궁을 거쳐 다시 서대문역으로 쉬엄쉬엄 돌아오니 2시간 정도 걸리더군요.
그 곳에 대한 탐방기는 따로 정리해서 쓰겠습니다. (이곳에 있습니다)
선배와의 약속장소인 마포로 갔습니다.
한 동안을 같이 일했던 선배와 만나서 점심, 커피, 그리고 짧은 담소를 나누곤 서둘러 청량리역으로 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14시 50분 청량리발 무궁화.
어제 올라온 길을 되집어 내려갑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기차에 오른 여자친구를 바라보며 플랫폼에서 아쉬움의 애뜻한 몸짓을 보이던 젊은이가 결국 눈시울을 붉히더니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즘엔 보기드문 아나로그 감성의 이별 장면이네' 하다가... '아! 이런 것이 여행이 주는 보너스 인가보다' 라는 생각에 이번에 나들이를 나서길 잘했다고 나 자신을 칭찬 합니다.
기차는 의외로 만석 이었습니다.
대부분 짧은 구간을 이동하는 사람이어서 좌석의 임자 바뀜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안동을 지나자 타는 사람이 줄어들며 빈좌석이 점차 늘어 납니다.
경주와 울산을 지나니 마침내 객차에는 손으로 꼽을 정도의 승객만 남아 있습니다.
동부산 관광단지의 환한 불빛을 지나 오후 8시 33분 신해운대역에 도착하였습다.
아내가 마중을 나와 있기에 반갑게 손을 잡고 함께 걸어서 집으로 왔습니다.
행복한 나들이 였습니다.

2024.07.06 에 다른 곳에 작성하였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2024년말 이 노선에 KTX와 ITX가 개통되며 무궁화 열차의 운행이 종료되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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