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의 즐거움9 아동 : 아카시아 국민학교시절의 성북동엔 아직 나무 우거진 산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초여름의 토요일 방과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집에서 30분 거리쯤 거리에 있는 야산 탐험에 나섰습니다. 도시의 아이들에겐 동네 부근의 낮으막한 산이라도 낯이 설었기에 해는 중천에 있고 날씨도 맑았지만 혹시 길을 잃어 날이 저물지도 모른다고 후레쉬를 챙겨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성북천 건너편 동네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니 집들이 듬성듬성해지고 빈터가 점차 많아졌습니다. 동네길이 산길로 바뀌고 나무도 많아져 우리는 점점 숲이 우거진 산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산 입구 안쪽으로 몇몇 무허가 판자집들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니 주변이 적막해 지는 것이 우리가 탐험지역에 들어섰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에서 오는 얕으막한 긴장감을 .. 2024. 12. 24. 아동 : 삼선교 어느 동네나 다리가 하나씩 있지요. 그리고 동네의 아이들은 대개 그 다리 밑에서 줏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나에게는 우리동네에서 가장 큰 다리인 삼선교가 바로 그 다리 였습니다. 삼선교는 북악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성북천에 만들어진 다리들 중 하나인데, 혜화동에서 돈암동을 거쳐 미아리 고개로 이어지는 전차길 대로를 가로지르기에 그 곳에 대로를 연결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큰 다리 였습니다. 지금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이 나의 기억속의 삼선교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리 밑에서 줏어왔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나에게는 큰 충격 이었지요. 형들은 놀리느라 내게 그렇게 말했겠지만 부모님도 부정하지 않고 웃고만 계셧기에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2024. 12. 10. 아동 : 손더스 중사 우리동네 골목끝 막다른 곳에 대문을 둔 집이 둘 있었습니다. 막다른 정면엔 꽤 큰 철제 대문을 가진 커다란 집이 있고 그 왼쪽 옆으로 측면에 자그마한 나무 대문을 가진 소박한 크기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나보다 두살 아래의 명호라는 이름의 남자아이가 살았습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엄마는 안계셨고 아빠는 군인이라 지방으로 전전하였기에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그 집을 '명호네' 혹은 '명호할머니네'로 불렀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골목에서 가장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는 집이기도 하고 나나 명호나 골목에 또래의 사내아이가 없어서 두살이라는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쪽집에서 같이 놀기를 권장하여 서로 심심치 않게 왕래하던 집이었습니다. 그 명호네 집에서 티비를 들여 놓은 것이 내가 2.. 2024. 11. 22. 학생으로 살기 세살 위의 작은 누나마저 학교에 들어가고나니 아침을 먹고난 오전시간이 갑자기 조용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들릴 정도의 조용함 이었습니다. 물론 간간이 어머니의 설거지소리 청소나 빨래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학교에 가고 혼자 집에 남은 아이는 극심하게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무리에서 따돌려진 외톨이의 느낌 이었고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 이기도 하였습니다. 빨리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라댔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일요일에 낮잠을 주무시는 안방에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들어갔을 때 겨우 뵐 수 있었으므로 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릴 계제는 아니었지요. 어머니는 나에게 여덟살이 되어야 학교에 갈 수 있다며 그대신 누나들을 다그쳐 일종의 가내제작 학습지 같은 것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 2024. 11. 20. 아동 : 혜화국민학교 여덟살이 되면서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유치원은 부자집 아이들이나 다니는 것이고 우리집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일곱살이 되었을 때 유치원에 보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세 명의 형과 두 명의 누나 아무도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이제 형과 누나가 학교에 가면 조용한 집에 혼자 남아 뒹굴며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나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집이 성북동에 있기에 형과 누나들은 모두 성북국민학교를 다녔거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혜화국민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막내 아들을 굳이 학군을 위반해 가며 옆동네의 학교에 보낸 것은 집에서의 거리가 더 가깝다는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혜화국민학교가 서울에서도.. 2024. 11. 18. 아동 : 소보로의 추억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십니다. 여덟 식구의 아침식사와 네 개의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기에 엄마는 눈을 뜨자마자 바쁘게 움직이십니다. 고등학생, 중학생, 국민학생인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집에서 나서는 순서대로 아침상을 준비해 주시고, 학교가는 형들과 큰 누나에게 도시락을 하나씩 들려 주셨습니다. 세명의 형과 두명의 누나가 등교하고 아버지도 출근 하시고 나면 어수선하던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 집니다. 엄마와 나, 평화롭게 아침식사를 합니다. 엄마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을 조용한 식사를 하면서 즐기시는 것 같습니다. 식구들이 저질러 놓은 일거리가 쌓여 있고 그 것들을 곧바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여유를 누리시는 듯 합니하다. 내가 밥을 다 먹고도 엄마는 한참.. 2024. 11. 16. 우리 식구 우리식구 I나에겐 형이 셋 있습니다. 셋이나 있었지만 형들은 나와 같이 놀지 않았습니다. 각각 십오년, 십삼년 그리고 십일년의 나이 차이 때문 이었을 것입니다. 네다섯살 경으로 생각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도 이미 큰 형은 대학생이었고 작은 형들은 고등학생 이었으니까요. 누나는 둘인데 오년과 삼년 터울이라서 상대가 되기는 하였으나 같이 어울리기 보다는 다툴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작은 누나는 자기가 오빠들이나 막내에 비하여 차별을 받는다고 자주 불평을 하였는데 효과는 커녕 오히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어머니에게 혼나기가 일수였습니다. 그 막내가 저 였습니다. 셋째 형과 큰 누나 사이에 누나가 한 명 더 있었다는데 625 때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명을 달리했다고 들었습니다.그 외에도 집안에서 유일하.. 2024. 11. 13. 아동 : 우리동네 성북동(1958) 삼선교에서 지금은 복개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파출소가 있습니다. 이 파출소는 60여년 전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파출소를 예각으로 끼고 돌아 몇 집 거리쯤을 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삼선교 큰길에서 오는 소로가 좌측에 있고 경신중고등학교 쪽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우측에 있습니다. 우리집은 그 언덕길을 따라 중간쯤 오르다 왼 쪽으로 난 골목 안에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남의 집 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유년기를 보냈기에 아직도 우리집 입니다. 기역자로 꺽이는 골목의 꺽인 정면에 우리집 대문이 있습니다. 우리집 대문을 앞에서 바라다보면서 오른쪽 꺽인 모서리 위치에 대문을 내고 그 안 쪽으로 또 하나의 대문을 가진 경희네가 우측에 있었습니다. 경희네 대문 .. 2024. 11. 11. 프롤로그 - 기억의 시간 속으로 우리는, 7080이라 불리우는 우리는 1970~8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략 1950년대와 60년대에 태어나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학창시절은 검정색 교복에 갇히어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되었습니다. 청년기는 민주화의 격동 속에서 피해자 혹은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되기도 하였으며, 모두가 앞으로 달려가는 고도성장기에 떠밀리듯 따라 뛰다보니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어 대부분이 중산층이 되었다고 자부할 때 느닷없이 IMF를 맞았고, 그 어두운 터널을 힘들게 힘들게 헤쳐나올 때 2002 월드컵이 개최되어 전 국민과 함께하는 응원 속에서 모처럼 속시원히 소리치며 남몰래 울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그동.. 2024. 11. 10.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