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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

그곳을 찾아서 - 1980 - 청도역

by 감성노트 2025.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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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논산훈련소에서 배출되며 태워진 군용열차는 차창의 가림막을 내린채 밤새워 달렸습니다.

7월중순 한여름의 아침은 일찌감치부터 가림막 틈새로 햇빛을 넣어주고 있었는데, 순간 덜크덕 소리를 내며 조금전부터 속도를 줄여오던 열차가 그예 멈춰섰습니다.

기차의 구동소리가 사라지며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증폭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가림막을 들추는 것은 금지된 행동이었으며 웬만하면 시키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가며 말라는 것은 마는 지침에 충실했던 소심남에겐 절대로 넘볼수 없는 극한 행동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미 가림막을 살짝 들어올리고 고개를 숙여 밖을 내다보고 말았습니다.

대략 이런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

 

눈에 들어온 풍경은 자그마한 시골 역사와 열차가 서있는 철길 사이의 조용한 공간, 그리고 역사 벽면을 따라 만들어진 소박한 화단, 거기에 피어있는 몇가지 색깔의 꽃들. 그리고 그곳에 쏟아지는 일요일 오전의 한가로운 햇빛들.

이러한 모습들이 마치 평화로움 속에 멈춰있는 시간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국방색 유니폼을 입고 열차에 앉아있는 것일까? 차창밖의 풍경은 내가 속할 곳이 아니란 말인가? 이 곳과 그 곳을 경계지우는 힘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생각이 뒤섞이고 있는데....

덜컹 하고 열차가 움직입니다.

이 풍경과 생각 그리고 역사의 이름을 훔쳐보고 가림막을 다시 내리는데 까지 모두 합쳐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을 짧은 일탈 이었으나 이등병 짝대기 하나를 단 지 24시간도 안된 신병으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특공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아낸 정차역의 이름이 '청도' 입니다.

처음 보는 지명이었고 도대체 어느 지역 어떤 도시 부근인지 전혀 감을 잡을수 없었지만 짧은 시간에 눈에 담은 평화로운 풍경이 기억속에 너무도 깊게 각인이 되었기에 3년후 제대하면 반드시 다시 찾아가 천천히 살펴보고 겪어보고 느껴보리라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1980년 여름, 군용열차는 신병들을 배정된 곳으로 배달하기 위하여 다시 속도를 높였습니다.


 

 


 

그동안 스쳐 지나가기만 여러번, 늘상 마음 한구석을 개운치 않게 자리잡고 있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엊그제 청도역엘 다녀왔습니다.

 

 

나의 기억에 각인되었던 1980년의 그 자그마한 간이역의 모습은 더 많은 열차가 정차하게 되면서 1987년에 개축되어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며, 그에 더하여 옆으로 크고 새로운 역사를 건설중으로 또한번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철길건너 플랫폼에서 바라보는 역사 한 편에 뜬금없는 초가지붕과 '전통생활문학관'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곳, 그 즈음이 45년 전에 내가 보았던 소박한 화단과 몇가지 색깔의 꽃들, 그리고 일요일 오전의 한가로운 햇빛이 있었던 자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자리를 바라보며 스물셋 그 때 내가 이 공간에서 그런 것들을 느꼈었구나....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늦은 한파에 아직 겨울바람이 매섭게 추워 오래 서있지는 못하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기억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그냥 바라보기만 하였고 아무것도 한 것은 없지만, 이젠 청도를 지날 때 오해를 푼 옛연인 처럼 편한 마음으로 대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잘했다 와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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