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성북동'하면 1966년 발행된 김광섭 시인의 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향집이 떠오릅니다.
서울에 났으니 서울이 고향이고 태어나서 자란집이 있으니 고향집이 당연한데 웬지 서울이라는 특대도시에서는 쓰면 안되는 말처럽 어색하게 들립니다.
두어 해 전 그 어색한 '서울에 있는 고향집'을 찾아가 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고향동네의 기억
삼선교에서 지금은 복개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파출소가 있습니다.
파출소를 예각으로 끼고 돌아 몇 집 거리쯤을 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삼선교 큰길에서 오는 소로가 좌측에 있고 경신중고등학교 쪽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우측에 있습니다.
우리집은 그 언덕길을 따라 조금 오르다 왼 쪽으로 난 계단 위 골목 안에 있습니다.
기역자로 꺽이는 골목의 꺽인 정면에 우리집 대문이 있습니다.
우리집 대문을 앞에서 바라다보면서 오른쪽 꺽인 모서리 위치에 대문을 내고 그 안 쪽으로 또 하나의 대문을 가진 경희네가 우측에 있었습니다.
경희네 대문 옆으로는 쌍둥이네의 한옥식 대문이 우리집과 직각으로 위치해 있었구요.
왼 쪽에는 우리 집과 담장이 연결된 남이네가 아담했던 우리집의 두 배쯤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두어집 건너서 골목의 끝에 명호 할머니네가 있었습니다.
우리집을 찾아서
삼선교에서 지금은 복개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파출소가 있습니다.
6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출소를 예각으로 끼고 돌아 몇 집 거리쯤을 가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삼선교 큰길에서 오는 소로가 좌측에 있고
경신중고등학교 쪽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우측에 있습니다.
그 언덕길 초입 좌측의 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뻗은 골목의 오른쪽에 우리집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남의 집 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유년기를 보냈기에 아직도 우리집 입니다.
계단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다행히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집이 보입니다.
우리집 대문을 앞에서 바라다보면서 오른쪽 꺽인 모서리 위치에 대문을 내고 그 안 쪽으로 두번째 대문을 가진 경희네가 우측에 있었습니다.
경희네 대문 옆으로는 쌍둥이네의 한옥식 대문이 우리집과 직각으로 위치해 있었구요.
뒤를 돌아보면 우리 집과 담장이 연결된 남이네와 두어집 건너서 골목의 끝에 명호 할머니네가 있었습니다.
우리집 앞에서 우회전 하여 뒤돌아 보면 우리집 대문이 이렇게 정면으로 보입니다.
골목길은 경신중고등학교로 연결되는 언덕길과 축대를 따라서 만나게 됩니다.
1965년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이 길로 언덕을 넘어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집의 기억
오래전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우리집은 성북동 언덕에 새로 택지가 조성될 때 한 필지를 불하받아 지었다고 합니다.
남달리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가 고지식한 아버지의 월급봉투 만으로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낸 역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살 위의 작은 누나를 이 집에 입주하여 낳았다고 하니 아마도 1955년에 입주하였을 것 입니다.
기억속의 우리집은.... 양옥집의 겉모습에 내부는 일본식이 가미된 구조였습니다.
대문을 열면 바로 현관문이 보이고 현관 안쪽엔 신을 벗고 올라서는 마루가 있습니다. 마루에 올라서면 앞엔 짧은 복도가 오른쪽 옆으론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과 화장실이 있구요.
복도 끝 안쪽엔 부엌문이 바로 보이고, 우측엔 골방문, 좌측엔 마루로된 거실이, 거실쪽으로 돌아서면 마루 건너 전면에 유리창 미닫이 문과 그 유리창 넘어 작은 정원이 보입니다.
거실의 오른 편은 안방 그리고 왼편은 건넌방의 미닫이 문이 있습니다.
2층에는 대문쪽으로 골목을 향한 창문이 있는 침대 방, 가운데는 책상이 있는 서재 방, 그리고 반대 편엔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으로 세개의 공간으로 되었습니다.
목조 바닥으로 된 위 층에는 난방이 안되어 겨울에는 사용하지 않았기에 여름에는 넉넉한 공간으로, 겨울에는 옹기종기 모여서 부모님과 우리 6남매, 그리고 서울로 유학온 삼촌과 때로는 사촌까지 십여명이 부대끼며 살았던 집입니다.
1969년 국민학교 5학년 가을에 마포구의 합정동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 살았는데, 아직 그 자리에 크게 바뀌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리모델링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보기도 좋았지만 기본적인 형태와 크기는 예전 집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작고하신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칸나꽃이 활짝 핀 화단과 함께 또 다른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될 것 같습니다.
'와보길 잘했다~'
다른 집들의 기억
어린 마음에 이사가는 집들이 부러웠습니다.
사실 이사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를 때였지만 이사짐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가는게 재미있어 보여서 우리는 왜 이사 안가냐고 졸라댔던 것 이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이사하던 5학년 가을 어느 날, 염원했던 트럭 짐칸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갔는데 점점 서울 같지 않은 동네가 되더니 '신촌'이라고 팻말 되어있던 로타리를 지나서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부근까지도 멈추질 않고 계속 가는 것 이었습니다.
큰 길에서 절두산성당 가는 샛길로 접어들며 아직 문전옥답을 가진 시골집도 남아 있던 변두리 미포장 길을 따라 양화진 선교사묘지를 접하는 곳까지 가서야 트럭이 멈춰섰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이사를 시작으로 하여 부모님과 살며 6번, 결혼하여 독립한 후에 7번등 지금까지 통산 13번의 이사를 하게되었답니다.
이젠 이사는 엄두도 못내지요.
그래도 기회가 되는대로 그동안 거쳐온 동네들 중 추억을 되새길 만한 곳을 찾아가보려 합니다.
이 또한 즐거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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